1. '판(飯)'과 '차이(菜)'
중국인의 음식 행위를 가장 극명하게 설명하는 말은 '인스(飮食)'라는 용어이다. '인스(飮食)'는 다시 '판(飯)'과 '차이(菜)'로 나누어진다. '판'과 '차이'를 우리말로 옮긴다면, 밥과 요리가 된다. 한국인의 식단이 밥과 반찬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면, 중국인의 식단은 밥과 요리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한국인의 일상 식단이 밥을 먹기 위해 반찬이 준비되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과 달리 중국인의 일상 식단에서 밥과 요리는 각각 독립적인 특성을 지닌다. 요리는 요리로써 단독으로 충분히 섭취된다. 밥은 미판(米飯:쌀밥)만이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의 반찬을 필요로 할뿐이며, 나머지 '판', 즉 멘탸오(麵條:국수)나 만토우(饅頭:찐방), 쟈오쯔(餃子:물만두), 그리고 차오판(炒飯:볶음밥)은 그 자체로 충분히 한 끼의 식사로 성립된다. 즉 별도의 반찬이 없이도 이들 '판'은 그 독자성을 지닌다.
전통적인 측면에서 중국인의 '판'은 밀과 벼농사의 생태-환경적 조건에 의해서 지역적인 구분이 지어진다. 즉 '창쟝(長江:양자강)'을 기준으로 북쪽이 대체로 밀농사 지역에 속해 이곳의 중국인들은 '판'으로 멘탸오(麵條:국수)나 만토우(饅頭:찐방), 쟈오쯔(餃子:물만두)를 주로 먹는다. 아침으로는 만토우가 주류를 이룬다. 점심과 저녁에는 멘탸오와 쟈오쯔를 먹는 것이 보통이다. 중국 북방의 밀농사는 보통 10월에 파종하여 다음해 6월에 수확한다. 북방은 밀의 주산지이기도 하며 동시에 밀 생산량이 많고 그 맛도 좋은 편이다. 그렇다고 남방에서는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남방에서는 밀가루를 반죽할 때 물과 함께 알카리 성분의 '젠쉬( 水:소다수)'를 섞어야 제대로 맛이 난다고 한다. 이는 남방의 물이 산성이기 때문에 소다수로 이를 중화(中和)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남방의 밀가루 음식은 그 맛이 북방에 미치지 못한다.
창쟝 이남의 남방에서 주로 하는 농사는 벼농사이기 때문에 남방인은 쌀로 지은 밥을 주로 먹는다. 쌀밥은 그 자체로 먹기가 어렵다. 이로 인해 남방인은 쌀밥과 함께 두세 가지의 채소 볶음요리와 탕(湯)으로 구성된 식단을 갖추어서 식사를 한다. 식단 차림의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남방인은 아침에 주로 콩가공식품인 '도우쟝(豆漿:순두부)'이나 '도우유(豆乳:뜨거운 콩국)'에 '유탸오(油條:밀가루 반죽을 기름에 튀긴 음식)'를 아침으로 먹는다. '조우(粥:쌀죽)' 역시 아침 식사로 대표적인 것이다. 쌀죽이나 콩국을 먹을 때 습관적으로 준비되는 것이 중국의 짠지라 할 수 있는 '쟝차이(醬菜:채소를 간장에 절인 음식)'이다. 탄수화물의 섭취를 원활하게 돕는 짠맛의 채소절임음식은 중국 남방에서는 필수적인 반찬 구실을 한다. 이렇듯 중국의 북방과 남방이란 생태-환경적 구분은 그들의 주식 자체가 구분되도록 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북방에서도 벼농사 지역이 확대되어 쌀밥을 많이 먹는 가정이 늘어나고 있다. 아울러 남방의 아침식사가 북방으로 전해져서 순두부나 쌀죽을 먹는 북방인들이 점차 증가한다.
중국인은 스스로 자기나라를 '요리의 천국'이라 부른다. 그만큼 중국음식에서 '차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높고 그 종류 역시 재료·조리법, 그리고 지역과 민족성분에 따라 수없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인의 '차이'라는 것도 일상의 것과 의례적일 때 준비되는 요리 사이에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가정에서의 일상적인 식사는 가능한 간단하게 마련한다. 특히 중국대륙에서는 모든 직장의 숙소에 식당이 별도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집에서 직접 음식을 만들기보다는 식당에서 사 먹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중국인은 일상의 음식생활을 가능하면 간단하고 편리하게 해결하려 한다.
가정에서의 일상식사는 가능한 간단하게 준비하는 것이 중국인이 지닌 생각이다. 집에서 먹는 저녁과 점심 식사에는 두세 가지의 '차이'가 따른다. 이때의 '차이'는 몇 가지 채소와 돼지고기·목이버섯·계란을 볶아 만드는 '무시로우(木須肉)'와 같은 '쟈창차이(家常菜:가정요리)'가 준비된다. 우리의 상상과 달리 중국인의 일상 식단은 매우 간단하다. 더욱이 사회주의적 생활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대륙중국의 경우 모든 직장의 숙소에는 식당이 운영되고 있고, 여기서 먹을거리를 사서 집에서 먹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만큼 중국인은 일상의 음식을 가능하면 간단하고 편리하게 해결하려 한다.
가정에서 남성에 비해 여성의 발언권이 강력한 북방인은 부부가 함께 직장생활을 한다는 점까지 합쳐져 가정에서의 요리를 누가 담당할 것인가에 대해 분명한 구분을 두지 않는다. 전업주부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중국대륙의 가정에서 손님을 청했거나, 특별한 날을 제외하면 점심과 저녁의 식사는 매우 간단하게 준비된다. 만약 가정에 손님이 왔다면, 전통적인 베이징 사람의 경우 손님이 오랫동안 머물기를 권하는 뜻에서 국수를 대접한다. 귀한 손님일 경우 일반적으로 요릿집에서 대접한다. 이때 주인은 경제적 형편에 맞추어 각종 지역적 특성을 지닌 요릿집을 선택하여 손님을 모신다.
사실 지역적 특성을 지닌 각종 요리의 발생은 기후와 사람들의 체질 그리고 역사적으로 형성된 각 지역의 사회-문화적 배경과 관련을 맺고 있다. 가장 보편적인 인기를 누린 쓰촨요리는 다른 말로 추안차이(川菜)라 불린다. 음식의 맛이 대체로 매운 맛 위주이다. 그 이유는 쓰촨 분지의 습기 많은 기후와 관련이 있다. 더욱이 소설 삼국지의 유비·장비·관우장·제갈량이 활동했던 곳답게 쓰촨의 요리사들은 음식재료의 선택과 응용에서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예를 들어 그들은 같은 부위의 돼지고기 하나로 '후이궈로우(回鍋肉;채소와 돼지고기 볶음)'·'위샹로우(魚香肉;생선맛이 나는 돼지고기요리)'·'쟝바오로우딩(醬爆肉丁;된장을 넣어 높은 온도에 튀긴 요리)'·'궈바로우피엔(鍋巴肉片;돼지고기 볶음에 누룽지를 올린 요리)'처럼 같은 재료로 각각 채소맛·생선맛·장맛을 낸다.
이에 비해 가장 고급스러운 음식으로 꼽힌 광둥요리는 이른바 중국 요리의 또 다른 핵심이라 할 정도로 조리법과 음식의 종류가 많고 특이하기로 유명하다. 일명 '웨차이(월菜)'로 불리는 이곳의 음식은 그 원료의 범위가 매우 넓어 해산물에서 짐승류, 그리고 조류에 이르기까지 다리가 있는 것은 식탁과 사람을 빼놓고는 쓰이지 않는 것이 없다. 특히 음식의 맛이 매우 담백하다. 그런데 이 담백한 맛의 비밀은 새우젓·굴기름·생선소스〔魚露〕와 같은 조미료로 맛을 내기 때문이다. 특히 이 지역은 원나라 때부터 구미와 해양을 통해 교류가 많았던 탓에 유럽음식의 영향을 많이 받아 소스류가 발달했다.
이외에도 기름를 많이 사용하는 산둥(山東) 지역의 '누차이(魯菜)'와 단맛이 강한 상하이(上海)의 '하이차이(海菜)' 역시 지역적 특색을 그대로 간직한 음식으로 손꼽힌다. 특히 우리에게도 익숙한 산둥요리의 특징은 돼지기름을 많이 사용하여 고열량과 고단백을 추구한다는 점에 있다. 이와 같이 이미 이름난 지역음식들 말고도 지역마다의 요리들이 있다.
여기에 최근 더해지는 요리로 소수민족의 것이 있다. 즉 윈난(雲南) 다이( )족의 음식, 옌벤 조선족의 음식, 신쟝(新疆) 위구르족의 회교사원 요리인 칭전(淸眞)요리 등이 민족적 특성과 생태-환경적 요소의 특징으로 인해 인기를 모은다. 특히 양(羊)고기는 한족중국인에게 새로운 맛을 제공하는 요리로 자리를 잡았다. 양로우촬(羊肉串:양고기 고치)과 카오양( 羊), 그리고 양고기 샤브샤브의 일종인 수앙양로우( 羊肉)는 겨울철 음식으로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를 모은다. 이러한 소수민족 음식의 유행은 중앙정부의 소수민족 선양정책과 관련을 맺는다. 전체 인구의 95%를 점하는 한족들은 개방개혁 정책이후 각종 언론을 통해 소수민족의 음식과 그들의 문화를 이국적인 것으로 배워왔다. 최근 좋아진 경제 형편은 입맛을 더욱 다양하게끔 만들었고 결국 부드러운 고기맛을 지닌 양고기에 입맛이 집중된다.
2. '차(茶)'와 '쥐우(酒)'
중국인의 전통적인 '인(飮)'에는 '차(茶)'와 '쥐우(酒)'가 있다. 차는 당나라(618-907년)에 들어와서 비로소 음료로서 일반에 보편화된다. "신농(神農)이 여러 가지 풀을 맛보다 하루는 72 가지의 독이 몸에 퍼졌는데, 차로써 해독했다(『淮南子·修務編』)"는 기록이 보여주듯이 당나라 이전의 차는 음료이기 전에 약초의 일종으로 인식되었다. 차의 일상음료화에는 불교의 중국유입과 관련을 맺는다. 차를 마시면 정신을 맑게 한다하여 남북조시대(420∼589년)의 불교 승려들이 차를 즐겨 마시기 시작했고, 불교가 가장 번성했던 당나라(617∼907년)에 들어와서 차 마시는 습관은 일반에도 퍼졌다. 이렇듯 차에 대해서 중국인은 '약'이면서 동시에 '음료'라는 중층적 인식을 지닌다.
우리가 중국음식에 대해 가지는 '맛이 느끼하다'는 인식과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중국음식의 조리과정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기름 때문이다. 중국음식의 조리법은 대체로 볶고(차오:炒, 류: ), 졸이고(젠:煎), 튀기고(자:炸), 찌고(정:蒸), 굽고(카오: , 웨이: ) 하는 법으로 나뉜다. 각각의 조리과정에서 기름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재료에 든다. 그러나 모든 요리에 기름을 두루 많이 사용하게 된 배경에는 건조한 기후가 주류를 이루는 북방 중원이 중국 역대왕조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아울러 역사적으로 3백년 전후마다 주인이 바뀐 왕조는 요리에 더욱 많이 기름을 사용케 했다. 왕조의 형성기와 멸망기에 대륙 전체를 휩쓰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한 왕조는 대략 1백년 정도라는 기간만 태평성대를 이루었을 뿐, 나머지는 대부분 불안정한 전쟁 중이라 일반 민중들의 음식생활은 평탄하지 못했다. 신선하지 않은 식품재료를 조리할 때 기름을 많이 사용하면 불순물을 제거하고 재료의 맛을 살릴 수 있다. 아울러 기름을 많이 써서 조리한 음식은 그 보존기간이 다른 것에 비해 길다. 이러한 점이 중국음식을 더욱 느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기름이 많이 사용되면서 발생되는 음식의 산성화 경향은 중국인의 건강에 치명적일 수 있다. 이를 중화시키는 역할을 '차(茶)'가 한다.
알려진 바와 같이, 차에는 카페인과 함께 각종 알카리성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차를 마시면 찻물이 체내에서 빠르게 흡수되어 농도가 짙은 알카리성 대사 물질을 만들어낸다. 기름지고 달고 짠 중국음식을 많이 먹으면 체질이 산성화되어 만성피로·정서불안·소화불량 따위를 일으키는데, 이때 차를 마시면 산성화된 체질을 개선하여 혈액 중의 산성과 알칼리의 균형을 유지시켜 준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뜨거운 물(카이쉬:開水)을 담은 보온병을 품에 안고 살며, 어디를 가든지 간에 찻병을 휴대한다. 또한 기름기 많은 음식을 즐겨먹는 중국인들 중에서 심각한 사회적 비만 현상이 두드러지지 않다는 사실도 차 마시는 습관과 관련을 맺는다.
차의 종류는 주식에서의 남북 차이와 똑같이 북방인들은 훙차(紅茶), 남방인들은 뤼차(綠茶)를 주로 마신다. 훙차는 그 성질이 따뜻하여 차가운 지역에 사는 북방인들에게 알맞다. 이에 비해 더운 남방인에게는 차가운 성질의 뤼차가 어울린다. 또한 중국인들은 보편적으로 계절에 따라 각각 다른 차를 마신다. 곧 봄에는 양기(陽氣)를 보충하기 위해 후아차(花茶)를 마시는 것이 좋고, 여름에는 기온이 높아 덥기 때문에 뤼차(綠茶)를 마셔야 하고, 가을과 겨울에는 날씨가 추우니 훙차(紅茶)로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좋다고 여긴다. '뤼차'와 '훙차'라는 분류법은 그 찻잎의 성질에 따라 차 만드는 법이 다른 데서 발생하는 각기 다른 찻물 색을 두고 구분하는 법이다. 뤼차로는 항줘(抗州) 시후(西湖)의 룽징차(龍井茶)와 쓰촨(四川)의 마오펑차(毛峰茶)가 유명하다. 훙차로는 안후이(安徽)성의 치훙(祁紅)과 윈난(雲南)성의 덴차( 茶)가 이름이 났다.
종래 중국의 수질이 좋지 않아 중국인은 차를 마실 수밖에 없다는 우리의 인식은 일정한 부분에서 옳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중국음식과 차가 잘 어울리는 음식의 궁합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놓치고 있었다. 중국인에게 차 마시는 습관은 단순히 목을 추이고 체질을 개선하는 데만 머물지 않는다. 차는 술과 함께 손님을 접대하는 의례(儀禮) 음식으로 인식된다.
주(周)나라(서기전 11세기∼전256년)를 세운 '우왕(武王)'은 자신이 멸망시킨 상(商)나라(서기전 16세기∼전11세기)가 망한 이유로 '줘왕(紂王)'이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진 채 국사를 올바르게 돌보지 않았기 때문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대신(大臣)들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도록 했다. 당나라 이전 중국인들이 손님을 접대하는 데는 술과 음식이 쓰였다. 차 마시는 습관이 보편화된 당나라 이후 술에 대신하여 차가 손님을 접대하는 음료로 일대 선풍을 이루었다. 당시의 문인들은 술 대신에 차를 마시며 고아한 정취를 즐겼다. 오늘날에도 많은 중국인들은 이름난 좋은 차를 가장 고급스러운 예물로 여긴다. 좋은 차를 구입하기 위해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고 유명한 찻집을 찾아가는 모습은 대륙중국에서 쉽게 볼 수 있어 특이하지 않다. 그들이 차에 기울이는 중층적인 이해는 요리 대국의 이미지에 잘 어울린다.
그래서 중국인의 식생활에서 술이 차지하는 입지는 우리네와 십분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리바이(李白)란 시인을 생각하며 중국인들은 술을 무척 즐긴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들의 도수 높은 바이쥐우(白酒)는 우리로 하여금 중국인이 마치 보드카를 즐기는 러시아인처럼 광폭하게 술을 마신다고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대륙중국의 대도시에서 늦은 밤 우리네처럼 술에 취해 만신창이 된 사람들을 보기 어렵다는 사실은 우리의 이러한 인식을 다시 한번 돌이켜 보게 한다.
중국인이 지닌 전통적인 술에 대한 인식은 몇 갈래로 나뉜다. 첫째로 술은 하늘과 인간을 연결시켜 주는 매개물이라는 인식이다. 《尙書·酒誥》에는 주나라의 줘궁(周公)이 논한 술에 관한 가르침이 보인다. 즉 "술은 하늘(上帝)이 사람들에게 마시라고 만든 것이 아니라, 제사 때 사용하라고 만들었다." 술을 매개로 한 제사를 통해 인간은 신을 만난다. 제사가 끝나는 시점에서 사람은 신이 마셨던 술을 음복(飮福)함으로써 신과 일체를 이룬다. 둘째로 술을 권하는 행위는 예의의 하나로 인식된다. 한족 중국인들은 손님을 연회장에 청해 식사를 함께 하면서 요리가 나올 때마다 술 마시기를 권한다. 그러나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고 무시하지 않고 억지로 마시도록 권하지도 않는다. 술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시(關係)'를 이어주는 매개물일 뿐이다. 그렇다고 모든 중국인들의 술 마시는 모습이 이렇다는 것은 아니다. 일부 소수민족의 경우 술을 많이 마셔야 서로의 관계가 돈독해진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차 마시는 습관은 없고 그 대신 술을 음료로써 마시는 민족도 있다. 한족들 사이에서도 술 마시기 내기를 위해 식사 후 게임을 하기도 한다. '쥐우링(酒令)'이라고 불리는 이 관습은 술을 놓고 서로 게임을 하여 패한 편이 벌주를 마시는 놀이다. 곁으로 보기에는 이러한 놀이가 술을 많이 마시도록 권하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다른 면에서는 전체의 분위기를 상승시키면서 게임으로 술 마시는 시간을 지연시켜 취하는 것을 늦추는 작용도 한다. 바이쥐우 한 모금을 마신 후 차 한잔을 마시는 주법(酒法)에는 차로 알콜을 중화시키려는 배려가 담겼다.
여기서 중국 술의 종류를 살핀다. 바이쥐우(白酒)만이 중국 술은 아니다. 찹쌀을 주로 써서 누룩과 약재를 넣은 후 당화(糖化) 과정을 거쳐 발효된 밑술을 압착해서 만들어내는 '황쥐우(黃酒)'는 그 알콜도수가 16°∼18°로 우리의 청주와 같은 것이다. '황쥐우'로 이름난 술은 저쟝(浙江)의 사오싱(紹興)을 든다. 황쥐우는 술로서 뿐만 아니라, 음식을 조리할 때 조미의 기능이나 생선의 비린내를 없애는 데 사용되며, 중국의학에서 주요 약재를 보충해 주는 보조제로 쓰이기도 한다.
바이쥐우는 증류주로 술의 색깔이 황주와 달리 투명하고 혼탁하지 않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알콜 도수가 보통 40°이상인 것이 주류를 이루는데, 최근에 들어 독주를 기피하는 경향이 대륙중국에서도 일어나 30°의 증류주도 등장했다. 중국 술 중에서 가장 애용되는 술이 이것이다. 원료와 향에 따라 그 술 종류는 수백 가지에 이른다. 주로 사용되는 원료로는 수수·옥수수·쌀·보리·고구마·감자 등 여럿이 있으며, 들어가는 향과 누룩에 따라서도 술맛이 다르다. 오늘날 대륙중국에는 지역적인 특성과 문화적 배경에 따라 특색이 있는 각 지방마다의 고유한 술이 여럿 있다. 국가에서는 매년 이들 술들을 한군데 모아 술 품평회를 개최한 후 그 해의 국가명주(國家名酒)를 선정하는 행사를 펼친다. 그래서 매년 전국 5대 명주(銘酒)니 10대 명주니 하는 것이 광고를 통해 선전된다.
3. '커런(客人)'과 '추스(廚師)'
중국요리는 차가운 요리인 '량차이(冷菜)'에서 시작하여 뜨거운 요리인 '러차이(熱菜)'로 이어지는 음식이 정해진 코스에 따라 상에 오른다. 공산화가 되기 이전 대륙중국의 일반인들은 커런(客人;손님)이 오면 집에서 직접 요리를 만들어 대접했다. 제법 부자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만이 손님이 오면 특별히 요를 시키든지 아니면 요릿집에 가서 먹었다. 그런데 요리를 어디서 먹느냐 하는 결정은 커런(客人)을 맞이한 주런(主人)이 '커런'의 급수를 따져서 정했다.
대체로 정부의 관리가 아닌 보통 급수의 '커런'이 오면 요릿집에서 요리 몇 가지를 주문하여 집에서 먹었다. 이 때 중국 요릿집의 직원이 '나무로 만든 수레'에 음식을 담아서 직접 집으로 배달을 했다. 이것은 중국인들의 오래된 습관이다. 화교들은 세계 각지에 중국요리를 퍼트렸을 뿐 아니라 이러한 '요리 배달업'까지 보편화시켰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유행어로 떠오른 '철가방'은 원래 중국 대륙에 있었던 '나무가방'이 화교들에 의해 이 땅에 옮겨진 후 변형된 것이다.
'커런'이 정부의 관리와 같이 급수가 높은 사람이면 요릿집으로 청하여 대접을 했다. 요릿집의 식탁은 작은 정치가 이루어지는 장소와도 같았다. 이런 연회는 보통 매우 엄격한 격식을 요구했다. 주인이 먼저 요릿집에 도착하여 정부의 관리를 맞이한다. 주인은 손님이 도착하면 먼저 차와 담배를 권하며 한담을 나눈다. 손님이 모두 도착했으면, 왼쪽 좌석이 상좌(上座)가 되고 오른쪽이 다음이 된다. 상좌의 왼쪽이 삼좌(三座)가 되며, 차좌(次座)의 오른쪽이 사좌(四座)가 된다. 주인이 항상 출입구 쪽에 앉아야 하며 손님은 상좌에 앉아야 한다. 주인은 먼저 상좌에 앉은 손님에게 찻잔을 들어 권하면 손님들이 모두 일어나 이에 응하여 초청해준 데 대한 감사의 말을 하고 앉는다. 요리가 나오는 순서는 먼저 '량훈차이(冷 菜:생선이나 육류로 만든 차가운 요리)'가 나오고 이어서 '러훈차이(熱 菜:생선이나 육류로 만든 뜨거운 요리)'가 나온다. 그 다음에 계속해서 고급요리가 나오는데, 제일 고급으로 여기는 것은 생선요리이다. 예를 들어 '위츠(魚翅:생선지느러미)'로 만든 요리(한국에서는 '샥스핀'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것)나 '쑹수꾸이위(松鼠 魚:쏘가리의 몸통을 다람쥐모양으로 만든 후 여기에 마늘즙·죽순·완두콩·새우등을 볶은 양념을 뿌린 생선요리)' 와 같은 요리는 가장 귀한 음식 중 하나에 든다. 이들 생선요리는 보통 머리와 꼬리가 함께 접시에 올려져 나오는 데 접대를 하는 사람은 반드시 생선의 머리가 상좌에 앉은 손님을 향하도록 식탁에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의에 어긋난다.
중국 요리는 술안주로 어울린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배가 가득 차지 않은 상태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 요리가 하나 들어오면 주인은 술을 권한다. 그러나 술을 마시지 않는 손님은 차로 이를 대신하여 감사의 인사를 하면 된다. 대략 두서너 시간이 넘게 걸리는 이러한 연회에서 주인과 손님인 정부의 관리는 온갖 밀담을 나누며 서로의 이익을 챙긴다. 연회가 끝날 무렵 주인은 오늘 준비한 요리가 별로 신통치 않았다고 겸손의 말을 하고, 손님은 이 정도 요리면 자신이 먹어본 것 중에서 최고라는 찬사를 보낸다. 이렇게 화기애애하게 연회의 마지막이 장식되면 주인과 손님 사이에 있었던 문제는 대충 다 풀린 것이 된다.
이러한 전통적인 연회에 초대받은 손님은 가능한 배불리 먹었다는 뜻을 말이나 행동으로 주인에게 보여 주어야 하며, 이것이 곧 주인의 초대에 대한 손님의 예의 있는 응대라고 중국인들은 생각한다. 즉 모든 요리를 전부 먹어버리면 주인의 준비가 부족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손님은 음식을 남겨야 한다. 또 매번 새롭게 나오는 요리를 한번 이상 먹어보고 그 요리의 맛이 수준급임을 몇 번이고 표시해야 예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20가지 전후나 되는 요리를 한 번씩만 맛보아도 배가 금새 채워지기에 손님이 음식을 남기는 예의를 지키기는 쉽다.
그런데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이러한 연회에서 음식이 남아도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요사이 대륙중국인들은 식당에서 연회를 하고 나서 음식이 남으면, 거의 대부분 별도로 싸서 집으로 가져간다. 집으로 가져온 차가워진 음식을 다시 기름으로 조리하면 새 것처럼 먹을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 음식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남은 음식을 싸서 집으로 가지고 가는 대륙중국인의 태도는 그들의 실리적인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울러 이미 식어 맛이 없어 보이는 음식이지만 다시 기름에 익히면 마치 갓 만든 음식과 같은 특성을 지닌 중국요리의 기본이 이러한 관습을 가능하게 만든다.
'주런(主人)'과 '커런(客人)'의 관계가 정치적이 되면 반드시 음식을 만드는 '추스(廚師)'가 식탁를 만드는 후견인이 된다. '추스(廚師)'라는 이름에서도 보여지듯, 중국인의 요리사에 대한 관념은 주방을 책임지고 있는 전문가라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리가 보통 일컫는 '주방장'이란 호칭 역시 '추스'와 같은 뜻으로 이해되지만, 그 사회-문화적 배경은 십분 다르다. 고대 중국에서 '추스'의 사회 지위는 어떤 때는 상당히 높았고, 어떤 때는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에 들었다. 중국 추스의 선조격인 상나라 때의 '이인(伊尹)'은 가장 저명한 요리사로 재상 벼슬까지 올랐다. 이인은 중국 제1의 철학가 추스였으며, 그는 모든 세상의 일들을 음식을 조리하는 주방과 곧잘 비교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한 시절 명성을 날린 추스가 많았던 때는 추스의 사회적 지위는 상당했다.
전통적인 중국의 추스는 대부분이 남자들이 맡았다. 당나라 이후 여자 추스도 등장하지만, 그래도 중국인의 관념 속에는 '추스=남자'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각지의 맛과 조리기술 중 가장 우수하다고 알려진 것이 각종 경합을 통해 궁중으로 옮겨진다. 이렇게 추스의 기술이 공개적으로 평가받게 되는 배경에는 송(宋)나라(960∼1279년) 이후 급속하게 확대된 상업도시의 발달과 식당업의 번성과도 관련을 맺는다. 화약·나침반·종이같은 중국의 세계적 발명품이 황제의 권력을 옹고하게 하기 위해서만 사용되어 근대적인 발전이 없었다면, 추스의 기술은 그 목표하는 바가 황제에 있었기에 무한정으로 새로운 발명을 만들어냈다.
중국의 '추스'들이 하는 일은 철저하게 분업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분업의 전통은 이미 한(漢)나라(서기전 202∼서기후 220)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淸)나라(1636∼1911년) 말기에 와서 추스들 사이의 분업은 오늘과 비슷한 모습을 띤다. 즉 화로담당(爐子:뜨거운 요리를 만드는 사람으로 현재 한국 주방장들 사이의 용어로 '불판')·도마담당( 子:요리의 재료를 체 쓰는 사람으로 현재 한국 주방장들 사이의 용어로 '칼')·냉채담당(冷菜)·찜통담당(籠鍋:대그릇에 찌는 요리 담당)·밥솥담당(飯鍋:밥담당)·면담당(麵案:만두·교자·국수등을 1차 가공하는 일을 맡은 사람)등으로 나누어졌다. 오늘날 이러한 분업 시스템은 더욱 발전하여 대형 요리점에서는 매우 세분화된 형태를 보인다.
아울러 대륙중국에는 이러한 추스들을 배출하는 전문적인 요리고등학교와 요리대학이 지역마다 있으며, 하얼빈상업대학 내에는 석사과정도 설치되어 있다. 이들은 학교를 마친 후 10단계의 급수에서 가장 높은 특1·2·3급의 요리사가 되기 위해 경영·관리·이론·과학지식을 계속해서 습득한다. 오늘날 대륙중국에서나 화교들 사이에서나 '추스'는 대접받는 직업이라는 사실은 중국음식을 더욱 세계적으로 만드는 기초가 된다.
4. 중국문화와 중국음식은 융합과 동화의 산물
중국문화는 복합적인 다민족적(多民族的) 성격을 지닌다. 종래 우리가 행해온 중국이해는 다분히 한족 중심에 놓여 있었다. 한족이 중국문화의 모든 것을 창시한 것으로 이해해 온 우리의 태도는 중국인보다 더 골이 깊은 한족 중심주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라오쯔(老子)는 과연 한족이었을까'라는 새로운 문제 제기는 도교의 형성에 일정 부분 소수민족이 기여했을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중국문화는 여러 민족이 공동으로 형성해 온 것이다. 그래서 대다수 한족의 문화는 실제로 그 뿌리를 한족에 두고 있기도 하고, 소수민족에 두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중국문화는 융합과 동화의 산물이다. 중국음식 역시 예외는 아니다.
중국인의 음식활동과 중국음식 역시 다민족적인 성격을 지닌다. 재료 이용의 다양성은 중국음식의 특징 중 하나이다. 그러나 많이 쓰이는 부재료인 오이·샹차이(香菜)·양파·당근·석류·수박· 포도 등은 모두 중앙아시아로부터 중국으로 전해졌다. 조리법에서도 많은 부분이 중원의 한족이 주위의 소수민족으로부터 영향받아 형성된 것이다. 밀가루를 이용한 국수 만드는 법, 교자와 만두 만드는 방법 등은 원래 중앙아시아로부터 유입된 것이다. 양고기를 이용한 조리법은 대부분 몽골족과 위구르족의 것에서 왔다.
이렇게 오늘날의 시점에서 본 전통적인 중국음식은 한족과 소수민족 사이의 융합(fusion) 과정으로 이해된다. 융합의 대표적인 사례가 '만한시(滿漢席)'라고 불리는 연회식사이다. 청나라 초기 궁중에서는 만주족의 음식으로 식사가 마련되었다. 그런데 캉시(康熙) 황제 22년(1681) 새해 첫날 만주족의 음식을 차리던 것을 한족식으로 바꿨다. 이때부터 궁중에서는 만주족과 한족의 음식을 함께 황제의 식탁에 올리는 관습이 생겨났다. 황실의 이러한 경향은 다시 중국 각지로 유행하여 지방마다 다른 '만한시'의 식단이 만들어졌다. 결국 만주족이 자신의 전통을 한족에 맞추었고, 종국에는 만주족의 특색은 사라지고 한족화의 길을 걸었던 청나라의 문화적 특징이 이 '만한시'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곧 만주족과 한족의 퓨전〔융합〕은 한족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고귀한 결과인 것처럼 보이지만 만주족의 입장에서는 격심한 동화(assimilation)의 과정을 밟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한족의 문화가 주류를 이루는 오늘날의 대륙중국에서 한족문화의 우산 아래 놓인 소수민족의 문화와 음식은 격심한 동화의 과정에 놓여 있다. 낮은 알콜 도수의 곡주를 마시던 민족에게 값싼 한족의 바이쥐우가 소개되면서 그들은 곡주를 마시듯이 증류주를 마신다. 예를 들어 중국 서남부의 롤로족은 전통적으로 알코올 농도 4∼5%의 옥수수 술을 마셨다. 그들은 차나 음료를 마시는 습관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평소 집에 나무로 만든 옥수수 술 단지를 준비해 두었다가 손님이 오거나 잔치가 있으면 이 술을 음료수로 마셨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이 민족을 병합한 후 한족의 술인 '바이쥐우(白酒)'가 싼값으로 이 지역에 보급되었다. 그들은 번거롭게 만들어야 하는 자신들의 술을 마시지 않고 편리하게 한족의 술을 사서 마시기 시작했다. 비록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민족을 미개하다고 여겨본 적은 없었지만, 한족과의 접촉, 특히 이념으로 무장한 공산정부와의 접촉을 통해 자신들이 마시는 술을 미개하다라고 여기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옥수수술 마시듯이 알코올 농도가 50%나 되는 한족의 소주를 마시고 있다. 손님을 접대할 때도 그들은 '바이쥐우'를 큰 유리컵에 따르고 한 숨에 마시자고 요구한다. 취할 때까지 마셔야 제대로 마신 것으로 여기는 음주에 대한 인식체계는 계속 유지되어, 저알코올 술을 마시듯이 고알코올 술을 마신다.
이래서 전통적인 사회체제는 급속히 무너지고 그들은 한족 체제에 편입되어 간다. 한족에 비해 낙후된 경제여건을 지닌 소수민족 지역의 지식인들은 자민족의 음식과 음식습관이 전근대적인 것이라 규정짓고 한족의 습관을 따르려 애쓴다. 한족 음식을 먹는 것이 마치 도시화 혹은 근대화의 상징인 것으로 이해하고, 차 마시는 습관이 없던 그들이 차를 마신다. 자민족의 음식은 세대가 갈수록 언어와 함께 사라질 가능성이 많은 곳이 오늘날 대륙중국의 소수민족 사회이다.
이러한 조류에 중국 조선족도 끼여 있다. 옌벤을 중심으로 한 비교적 집중된 조선족 지역에서는 여전히 민족적 특성이 강한 음식들이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북경과 같이 한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곳에서의 조선족 음식은 한족의 영향하에 동화의 과정에 놓여 있다. 냉면에도 당연히 샹차이(香菜)가 얹어져야 하며, 이것은 이미 그들 입맛에 익숙해졌다. 이와 같이 전통적인 한족의 향신료들이 조선족의 음식에 확실하게 자리 매김을 하고 있다. 반대로 융합의 과정에 놓여 있는 것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김치이다. '차오쉐파오차이(朝鮮泡菜)'로 불리는 배추김치는 젓갈이 없이 담겨지는데, 발효맛이 덜한 한족을 비롯한 기타 중국인들이 별미로 즐겨 찾는 음식에 든다. 또 1997년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북어포무침·미역무침·각종나물 따위를 판매하는 북경의 한 조선 반찬점을 찾는 주고객은 한족들이 대다수였다.
한족의 문화가 지닌 융합력과 동화력은 중국문화를 이해하는데 유용한 기제이다. 한족의 음식으로 대표되는 중국음식과 한족으로 대표되는 중국인의 음식습관이 지닌 문화적 특성은 융합과 동화이다. 이는 언제나 외부의 새로운 것에 열려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쉽게 다른 것을 인정하고 수용한다. 그러나 그 수용은 일면에서 융합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지만, 궁극적으로 한족 중심체제로 동화한다. 중국인, 중국문화, 그리고 중국음식이 지닌 유연력(flesibility)과 적응력(adaptability)은 자신들의 음식 세계를 또 다른 세계로 만들어가는 데 결정적인 속성으로 작용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중화주의라 할 수 있다. 음식의 중화주의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계 각곳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확인한다. 이것이 중국인, 중국문화, 그리고 중국음식이 지닌 문화적 특징이다.
<1> 차) : '茶'를 북경표준말로 발음하면 '차(cha)'가 된다. 일본말로도 '茶'는 '차(ちゃ)'라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를 '차'혹은'다'라 발음한다.중국에서 당나라 이전까지 '茶'를 '塗(do)'라 발음했고 이후부터 점차 'cha'라는 발음이 보편화되었다(康熙字典-'茶' 참고).우리 나라에 다(茶)가 알려진 시기가 당나라 이전이었을 가능성이 많다.그러나 이성우는 '차'라는 발음은 중국 북부의 발음이며 '다'는 중국 남부의 발음으로 중국 화북과 강남에서 육로와 해로를 통해 차가 전해졌음을 '茶' 발음을 통해 설명했다(李盛雨, 1988《韓國食品文化史》 서울:敎文社, p.260).
<2> 바이쥐우) : 중국에서는 곡물을 발효시켜 증류한 술을 색이 없다고 하여 '바이쥐우(白酒)'라 부른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배갈'이라는 것은 산둥(山東) 지방에서 생산되었던 '바이쥐우'의 상표 이름인 '바이간(白乾)'에서 나온 것이다. 산둥 사투리로는 '보갈'이다. '바이간(白乾)'이란 말은 희게 증류한다는 뜻으로 '바이간사오(白乾燒)'라는 말의 줄임 말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증류주의 의미를 담고 있다. 또 '고량주(高梁酒)'라는 것은 중국 북방에서 수수를 원료로 발효·증류하여 만든 술을 일컫는다. 중국의 소주인 '바이쥐우'는 수수뿐만 아니라 각종 곡물을 원료로 하여 만들기 때문에 고량주가 중국 소주의 대표적인 명칭이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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